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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태극기는 중국것?

천부(泉扶) 2006. 11. 10. 12:16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태극의 어원

'태극'은 하나의 명사(名詞)로서 역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을 이름하여 태극이라고 하였다. 그 후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주돈이(周敦?)가 한 폭의 태극도(太極圖)를 그려 태극에 포함된 뜻과 그 발전 변화를 설명했다. 우리가 ‘태극도형’이라 부르게 된 것은 중국 주렴계(이름 돈이)가 태극도설을 발표한 뒤 정수학이 우리나라로 유입된(서기 1314년)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본다.

두번째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한 주장.

제3대 갸륵단군(BC 2181)이 가림토문자를 만들 때의 기록을 보면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가 있다해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라고 하여 훈민정음을 만든 취지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서가 있다해도'에서 보여지듯 가림토문자 이전에 만물의 모양을 본뜬 문자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는 배달국시대 한웅천황이 신지현덕에게 명하여 만들게 한 녹도문자로서 바로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이다. 신기한 것은 가림토 문자가 발견된 곳에는 의례히 우리와 같은 태극문양의 유물이 발견되며, 또다른 의견으로 나선형(螺旋形)의 태극무늬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고대의 여러 민족들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태극과 유사한 여러가지 도형은 미국 대륙의 인디언족 출토품과 유럽의 여러 각지에서 출토된 고대유물에서 볼 수 있으며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를 거쳐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화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도안들은 행운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사용되었고, 이는 고대 인류의 공통된 우주관에서 이루어진 우주 생성의 과정을 상징한 직관적인 도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도형들은 여러가지 형태를 혼용하여 사용해 왔으나 우리의 태극도형은 옛날부터 원형 그대로 지금까지 쓰여져 왔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태극을 신성과 신비의 부호로 사용해 왔으나, 차츰 쓰이는 범위가 넓어져 신성보다도 길상(吉祥)과 축복의 뜻으로 쓰게된 듯 하다.실제로 옛날에는 임금의 왕관에 태극도형의 반쪽모양을 곡옥(曲玉)으로 장식하였던 것을 점차 궁전과 사찰, 누각, 어문(衙門)등 건물을 비롯하여 거문고, 패물, 갓집, 부채, 장고, 베갯모, 숟가락, 식기 등 생활주변의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아름 새겨 길상의 뜻으로 표시하였으니 이 도형은 민족과 더불어 함께 쓰여온 한민족의 신성한 부호인 것이다.그런데 그 석재에 새겨진 태극도상을 보면, 신라의 왕관에 쓰던 곡옥(曲玉)의 형태와 같은 태극의 陰과 陽의 두쪽만을 한폭판에 새기고 태극의 좌우 양쪽에는 톱날(긴삼각형)과 같은 장방형 비슷한 무늬를 새겨놓았다.

이와같은 톱날(긴삼각형)같은 도형은 수학의 심대 난문인 원적문제를 이해하는 도형으로서 그 자체가 수수께끼의 원적(圓積)을 표시하는 도형인 것이다.따라서 석재의 도형은 중앙의 태극 형태를 이러한 원적으로서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운행이 원(圓)으로 이루어진다는데 결부되는 것이다.그 뿐 아니라 감은사지에서 발견된 태극도형과 그 밖의 여러가지 문체는 오래전부터 전해 온 능숙한 수법으로 새겨진 것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으로 보아 태극도형은 먼 옛날부터 내려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서 딱히 언제 부터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삼태극은 천지인 (하늘·땅·사람)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누어지기 전에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생겼고, 음양의 조화에서 오행(五行)이 생겼다. 세계의 궁극적 근거가 되는 태극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동양철학의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한국의 태극문양은 유사 이전의 암각화와 고인돌에도, 고구려 벽화 사신도와 액막이의 부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의 태극은 하늘이고 우주이며 해와 달(日月)이고, 음양의 화합을 통해 풍년과 다산을 염원한 표상이다. 중국에서 태극문양이 처음 보이기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부터인데, 그 연대는 송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태극은 가위바위보 놀이와 마찬가지로 먼저와 나중이 없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무한성을 나타낸다. 적·청·황색의 삼태극이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이고, 그 가치 또한 동등하다. 태극의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여 완전한 원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땅·사람이 모여 우주가 된다. 그러므로 태극과 삼태극은 모두 우주를 상징한다.천지인 3재의 조화사상은 삼태극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상층의 효는 하늘, 중층의 효는 사람, 하층의 효는 땅을 상징하면서 천지인 3효가 하나의 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효 역시 음과 양으로 괘 역시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다.음양의 태극은 빨간색이 양을 나타내고 파란색이 음을 나타낸다

건곤감리의 뜻

태극기의 가운데의 태극 무늬는 우리민족의 조화와 융합을 의미하며,건곤양괘는 무궁한 정신을 뜻합니다.
건 괘 -하늘,봄,동쪽,인을 뜻하면 기면의 왼쪽에 위치합니다
곤 괘 -땅,여름,서,의,를 뜻하며 기면은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합니다.

=>> 우리나라의 국운도 천지와 함께
영원무궁하자는 무궁의 정신을 표현한겁니다.

 

감리양괘 - 광명의 정신을 뜻합니다.
감 괘 - 달,겨울,북,지를 나타내구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합니다.
리 괘 - 해,가을,남,예를 나타냅니다. 기면의 왼쪽아랫부분에 위치합니다.

=>> 우리나라가 언제든지 달과 해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나라가 되자는 광명의 정신을 표현한것입니다.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적으로 조선 영해에 침입해 온 사건이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운 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요호를 보내어 강화도 부근까지 침입시키었다. 이를 발견한 초지진 포대에서 먼저 공격을 가하자 그들은 즉각 포격을 해 오더니,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마음대로 하였다. 우리의 수비 부대는 거대한 함포를 비룻한 발달된 무기를 갖춘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곧 물러갔으나, 이를 빌미로 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부분이 태극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운요호의 게양된 일본국기가 초지진 포대의 공격으로 불타버렸는데 이것을 가지고 일본의 국기를 게양했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한 사실에 대해서 속시원히 해명하라는 일본의 압박이 강화도 조약 당시 한몫을 했다.

우리 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챈 중국은 먼저 황준헌을 통하여「중국의 국기(龍旗)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하였다.
그 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하지만 국기 제정은 흐지부지해져갔다.

그 당시 국기 제정을 하는데 중국측 위원의 망언과 간섭은 역시 자주 독립국가인 우리나라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참지못한 고종 황제는 직접 나서서 국기를 제정한것이다.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때 박영효는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W.G Aston), 선장 제임스(James)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하였다.

이 태극기는 고베에 도착하였을 때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무처로 보고하였다.

 


 

濟物浦條約(제물포조약)에 따라 哲宗의 사위인 박영효(朴泳孝)와 김만식(金晩植) 두 사람이 수신사(修信使)로 仁川에서 日本으로 出發한 것은 1882年 9月 21日이었다. 當時 日本公使였던 하나부사(花房義質)도 同行했었는데 이 船上에서 國旗의 必要性을 절감(切感), 朴泳孝에 依해 太極旗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日本側 記錄에 보면 이미 그 6年 前인 강화조약(講和條約) 때에 國旗의 必要性이 話題가 됐었고 하나부사가 자기 나름대로 청백홍(靑白紅)의 삼파(三巴)무늬의 國旗 도안(圖案)을 그려 使用할 것을 慫慂(종용)했다 한다. 선상(船上)에서의 朴泳孝의 國旗 圖案에 하나부사가 관여(關與)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말(韓末) 韓國에서 宣敎活動을 했던 노블 牧師의 後孫이 保管해온 太極旗를 3년 前에 公開했었는데 그 保管函에 ‘公主 朴泳孝 婦人’이라 씌어 있어 太極旗의 始作이 朴泳孝라는 說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한데 朴泳孝가 太極旗를 처음 만들었다는 그 두 달 前인 1882年 7月에 出刊된 것으로 보이는, 美 海軍省 航海局의 世界國旗圖鑑에 태극무늬와 사괘(四掛)가 그려진 太極旗가 실려 있는 事實이 發見•公開됨으로써 太極旗는 朴泳孝 以前에 國旗 구실(口實)을 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朴泳孝가 修信使로 떠나기 넉 달 前에 있었던 韓•美 修好條約 調印 때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 조인식(調印式) 準備 過程에서 國旗의 必要性이 論議되자 會談을 간섭(干涉)하기 爲해 온 청나라 特使 마건충(馬建忠)이, 當時 청나라 國旗인 황룡기(黃龍旗) 圖案을 東邦色인 청룡기(靑龍旗)로 바꾸되 龍 발톱을 네 개로 줄여 속국(屬國)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이를 거부(拒否)한 김홍집(金弘集)은 임금은 붉은 옷이요 관리(官吏)는 푸른 옷이며 百姓은 흰옷이라 하여 흰 바탕에 紅靑의 태극무늬를 제시(提示)하자, 馬建忠은 太極을 붉은 龍과 푸른 구름으로 절충(折衷)하려 했지만 그리기 複雜하다는 理由로 太極에 八卦를 둘러 定着한 것이다.

韓•美 修好條約 調印式 두 달 後에 發行된 美國 國旗圖鑑에 실렸다면 이 太極 圖案의 國旗가 調印式에서 國旗 구실을 한 것이 되며, 國旗로 公式的으로 팔도(八道)에 공포(公布)한 1883年 3月 6日 以前에 國際的으로는 行世했던 太極旗다.

출처 : 사이버의병
글쓴이 : Ψ부시맨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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