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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클릭】9,200년의 한민족 실존 단군역사를 곰의 신화로 왜곡한 주범들

천부(泉扶) 2007. 12. 7. 13:17

● 9,200년이나 되는 한민족의 고대역사 자료-

   환단고기(桓檀古記) 원본 드디어 발견 


 
대한의 한민족, 그 뿌리는 무엇인가?

수십만권의 역사 장서들이 중국과 일본에 의해 왜곡되고 사라졌으나 , 한국의 뿌리역사에 진실을 찾을수 있는 문헌이 현존하고 있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와 계연수의 환단고기 외에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기 등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이미 불교의 안목으로 윤색되어 시원(始源)역사의 전모를 제대로 볼수는 없으나 우리 역사의 진실을 볼 수,있는 내용이 남아있기 때문에 뿌리역사를 찾는 소중한 자료이다. 또한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 등을 한권으로 엮어 1911년에 간행한 책이다.


여기에 잃어버린 한국의 고대사 7천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중에 하나는 1911년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위서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환단고기 원본 발견
위서논쟁 종지부 찍을듯
임성수 기자
▲숙명여대 도서관 자료 검색 결과  


 
이유립이 필사한 환단고기의 진위여부가 사학계의 위서 논쟁으로 대립되는 가운데, 그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환단고기 원본이 발견되었다.
 환단고기는 그동안 그 내용의 가치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에서 시대적인 오류가 발견되어 한참동안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위서'라는 논쟁에 휩싸여 빛을 바랬다.
 
이에 대해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영되어 논란을 뜨겁게 달구었었지만, 연구의 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원본을 옮기는데 있어서 몇몇 오류때문에 가치를 무시하는 입장과 그럼에도 필요한 부분은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 선생이 공개한 필사본으로 1911년에 계연수 선생에 의해 간행된 원본이 아니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 선생에 의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을 엮어 한정판 30부로 출간하였었지만 당시 일제 총독부의 사료말살 계획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던 중 단학회 인사들이 만주 등지에서 간직해오다 해방 후 이유립 선생이 귀국하여 원본을 오형기씨에게 필사하게 하고 그것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유립 선생은 원본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기성 역사학계로부터 원본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이유립 옹은 공개하지 못하고 결국 마음고생을 하다 1986년에 작고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숙명여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어, 확인 결과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 도서관에는 원본이 없었고, 숙명여대에서 확인되어, 복사본을 구해 이전의 오형기 필사본과 원문을 대조한 결과 이것이 필사되기 이전의 원본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애국지사로서 건국 훈장을 받은 바 있는 송지영 전 KBS 이사장이 1989년에 숙대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문제는 민족사서들은 하나같이 ‘대출불가’로 되어 있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환웅천황이 신시를 열었을 때의 이상과 정치,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했을 때의 백성 사랑과 통치이념,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과정의 고난과 다물을 연호로 정한 이유, 왕건이 무엇을 통일하려 했던가를 심각히 연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때, 선조들의 정신세계와 역사흐름의 일관성을 꿰뚫어볼 때,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 제대로 정해지고 한국인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있으며 또한  민족의 번영과 세계사에 대한 기여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 역사의 면면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에 관련된 많은 논문이 발표되길 기대한다. 

환단고기 (1911년 숙명여대 영인본 찍은 자료)

광무 원년이 1897년 이므로 초판 발행은 1911년 30부 재판 발행은 1979년 100부

 


 
숙대영인본 표지


KBS 송지영 이사장이 1989년 숙대 50주년 기념으로 기증 했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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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0년의 한민족 실존 단군역사를 곰신화로 왜곡한 주범들

 

 

 

●환단고기(桓檀古記)---恒泉(늘샘) 강수원 번역편.

 

   발행일: 1985년 11월 15일

   발행처: 온누리

    번역   : 恒泉(늘샘)  강수원

    1916년 전북 고창 출생. 고창고등보통학교 졸업.동경 전수대학 졸업.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시모노새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복역.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

    이리(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국사교사로 재직. 원폭 피해자 협회장 역임.

 

※ 재야 사학자 강수원님께서 저술하신 책 "환단고기" 번역본의 중요부분인 p200~p208까지의 내용을 강동수<민초>가 발췌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주도해온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해 유명하다는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환단고기 원본을 잘못 해석 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한민족의 역사를 곰의 자손으로 왜곡한것을 인정 해준 꼴이 된 사실들을 소개 합니다.

 

   발췌 / 강동수<민초>

 

 

환단고기의 해제

 

우리의 지상 목표인 민족 중흥과 조국의 선진화 사업을 이룩함에는 사기를 드높여야하고 사학(史學)을 밝여야 한다. 사학이 밝지않으면 사기를 떨치지 못하며, 사기를 떨치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법(正法)이 갈라진다.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법이 갈라지는데 어찌 중흥과업 및 조국의 선진화 작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라에는 나의 꼴이 있고, 역사에는 얼(魂)이 있으며,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이어가며 발전한다.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나라의 꼴에는 얼이 있다. 꼴만 있고 얼이 없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신시(神市( 개천(開天) 이래로 스스로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나라와 민족은 그 전통을 이어받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우리의 정통 이념과 주체성을 이루었고 전통문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전통이 민족혼이다. 이를 잃어버리고 어찌 나라를 보전하며 중흥과업인들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고귀하고 찬란한 민족혼을 잃고, 남의 정신에서 살다가 국권을 빼았기고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광복 후 천우신조로 나라는 되찾았으나  역사와 얼은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민족의 중흥과 조국의 선진화를 위해 크게 자각하고 반성하여 일대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첫째, 조국의 현대화와 선진화를 위한 민주혁명이다.

둘째,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민족 혁명이다.

셋째, 정신 사상의 개선을 위한 교육과 사학 혁명이다.

 

이 혁명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선행 되어야 할것은 교육 혁명과 사학 혁명이다.

그러나 선행 되어야 할 사학 혁명은 실로 난제중의 난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기본이 되는 고전(古典)은 거의 인멸 되었거나 왜곡 . 위조 되었으며, 이를 착각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고사(古史)의 인멸

 

우리 고사는 5천년이란  기나긴 역사속에서 거의 인멸 . 왜곡 . 위조됐다.

 

첫째, 외적의 침략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만도 고구려 동천왕때 관구검에 의한 환도성함락(A.D. 244), 백제 의자왕때  나당(羅唐) 연합군의 사비성함락(A.D.660), 고구려 보장왕때 나당(羅唐) 연합군의 평양성함락(A.D.668), 고려 고종때 원(元)나라의 침략전쟁(1233), 조선조 선조때의 임진왜란(A.D.1592), 인조때의 병자호란(1636)에서 수 많은 전적과 사서가 불타고 약탈당하여 없어졌다.

 

둘째, 국내 정변에 의해 불타서 없어진것으로는, 신라말 경순왕(727)때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의 서울 경주를 점령 신라의 모든 전적을 완주(完州)로 옮겼는데 왕건 태조가 후백제를 쳐 합병할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셋째, 정치적 의도에 의해 벙책적으로 분서 . 소멸한것은 조선조 3대 태종11년(1910)에 5북학당을 송제(宋制)로 설치하고 정주학(程朱學)을 정교(政敎:정치와 종교)의 기본으로 하는 숭유정책(崇儒政策)을 강행하면서 비 유교적 서적을 불태웠고, 1910년에 왜적이 국권을 박탈하고, 신민정책을 강행하면서 그나마 몇점 안되는 고서마저 몰수해 불태워 버렸다.

 

   

     2. 역사의 왜곡 날조 

 

이와같이 외세 침략과 국내의 변란 또는 정치적 정책의 소용돌이속에서 뜻하지않게 방화 . 약탈 . 분서 등의 갖가지 수난을 당하면서도 간신히 맥을 이어온 약간의 사료마저 종교적 . 사상적인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편견때문에 우리의 민족사론은 외래 신교와 외래 사상과 문화만을 맹신하는 얼빠진 사대주의자에 의해 박멸됐으며 그들의 손에 의해 왜곡 날조 당했다. 이와같이 우리의 역사는,

 

(1) 중국 사가(史家)들에 의한 위조---

 

중국 사가들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해서 중국을 높이고 존중하며 주변국가를 오랑캐라고 천시하는 존화황국사관(尊華皇國史觀: 중국은 황제나라라 하여 역사를 높이 보게함)에 빠져 그들의 국치(國治)에 관한 역사는 모조리 없애버렸을뿐 아니라 역사를 위조하고 날조했다.

 

(2) 사대모화주의자(중국을 흠모하는자)에 의한 위조---

 

옛날 단군조선 이래로 올바르고 밝은 역사서, 이를테면 배달유기(倍達留記) .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두로 고구려때의 유기(留紀). 신집(新集). 백제때의 백제기 . 백제본기 . 백제신찬 . 신라때의 신라본기 . 삼성기(三聖紀) . 표훈천사(表訓天詞)등 많은 고사들은 수난을 겪어 없어지고 현재 넓리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이 남아있어 신시(神市) 개천과 단군 건국역사를 말하는 이들은 이것만을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대주의와 외래종교에 빠져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한 대표적인 위사이다.

 

   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독실한 유학자인 김부식의 지휘아래 쓰여졌으니 이는 우리 국사라기보다는 한(漢)나라 역사책에 얽매이고, 유학에 빠져 중국 공자가 우리를 오랑캐라 말함을 스스로 달게 여기고, 기자(箕子)가 귀화했다는것도 무조건 믿고, 한무제가 토벌 했다는것도 믿으며 당고종이 평정했다는것도 믿으면서 우리 선민(先民)의 자랑할만한 빛나는 무훈(武勳)이 있음을 찬양하기는커녕 부질없이 황국사관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이다.(규원사화 참조).

 

   김부식이 고려 인종(仁宗 . 1123~1146)을 위해 삼국사기를 엮을때, 옛날 성인들의 공적은 기술하지 아니하고 다만 "해동삼국은 역년(歷年)이 장구하나 옛날에는 기록할 문자가 거칠고 옹졸해서 사적이 빠지고 없어져 지나간 일이 희미하다" 했다. 김부식은 이런식으로 그 책임을 모면하려 했으나 조대기(朝代記) .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비기(三聖秘記). 등의 고전을 구하려는 노력이 조선왕조 7代 세조의 수서유시(收書喩示)에도 보이거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때는 이보다 약 3백년전 이었으니 이런 고서가 전혀 없었을리가 없다.

 

김부식은 중국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데 사대주의만이 옳은것이라 하고,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빛 낼줄을 몰랐다. 어찌 김부식을 우리 정신을 간직한 사학자라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를 우리의 정사(正史)라 믿을 수 있겠는가.

 

    ② 삼국유사(三國遺史)엮시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연(一然)에 의해 쓰여졌다. 때문에 삼국유사는 불교적으로 윤색되었고, 그 기록에는 억측과 억설이 많다.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해 복애자는,

   "신시씨(神市氏)는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 아주 먼 옛날, 나라의 기틀을 잡았으니 단군(檀君)이전의 성인이시다. 고려 공민왕때 청평산인(淸平山人) 이명(李茗)이란 이가, 진역유기(震域留記) 3권을 지었다. 이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이 책에서는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고 특히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이 책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신(神)으로써 교(敎)를 베풀고, 옛것에 쫓아 풍속이 되니 인심(人心)이 점점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이 책의 내용이 반고(班固 ;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나 사마천(司馬遷 ; 중국 전한때 사학가)의 글에 견주어서 못할게 무엇인가. 한(漢)나라는 한나라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어찌 당당한 진역을 한나라에 견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국사서가 여러번 병화에 없어져 이제 겨우  남아있는것은 다만 도가(道家)와 승려들의 기록만이 전하고 있을뿐이지만 그나마 큰 다행이다. 도가는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업한 줄기를 이었을 뿐 아니라 문헌의 잔맥(殘脈)을 얻었으니 동사(東史)를 논함에 있어 억측과 억설이 많은 승려들의 기록보다 훨씬 낫다고 나는 믿는다" 라고 갈파했다.

 

   사실 불교승려인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억측과 억설이 많다.

그 첫머리에 고조선 역사를 기록했는데,

   *위서(魏書)에 의하면 또는 고기(古記)에 의하면* 이라고만 했지 고기가 조대기나 삼성기, 고조선비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완전히 신화로만 엮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일연도 중국서적에 빠져 그 저서에서 "대저 옛날 성인이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었으므로 괴력난신(怪力亂神 ; 괴이<怪異>와 용력<勇力> 패란<悖亂>과 귀신<鬼神>)에 대해서는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때는 부명(符命)에 응하고 도록(圖록)을 받아, 보통 사람과는 다른것이 있었다. 그런 뒤에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룰 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하수(河水)에서 도(圖)가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燈)에게 감촉되어 염제(炎帝)를 낳았다...... 그 뒤의 일을 어찌 다 적으랴 " 하며 이를 전제로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는 분명히 우리 고사(古史)를 중국책에서 본 신화(神話)로 윤색하고 불교의 색채를 가미한 억설과 억측으로 꾸미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에서는, 우리의 정당한 옛 국사인 삼성밀기(三聖密記)나 조대기(朝代記)에서 웅족(熊族), 호족(虎族), 또는 양가(兩家)라고 쓴것에 비해 족(族)자와 가(家)자를 빼버리고 곰(熊), 범(虎)이라고만 했고,

 

   *함께 이웃에 살았다(同憐而居)는 함께 굴에서 살았다(同穴而居)로, 

 

   *한얼님의 계율을 잘 지킬 수 있는 착한 백성이 되게 하여주옵소서(願化爲天戒之氓)는 원컨데 사람으로 되게 하여주옵소서(願化爲人)로, 

 

   *다시 참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는 대인이 될 것이다(更得踐形之大人者)는 다시 사람의 모양을 얻을것이다(更得人形)로,

 

   *건전하고 씩씩한 아릿다운 여자의 모습을 얻었다(得健者之容)는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다(熊得女身)로,  

 

   *마침내 하늘 사업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終不得與之贊天業)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而不得人身)로 고쳐썼으니 어찌 이보다 더하게 정사(正史)를 변위(變爲)할 수 있단 말인가!! 이로 인해 우리 정사(正史 ; 한국의 바른역사)는 완전히 신화(神話 ; 단군신화)로 전락되고 말았다.

 

   역대(歷代)에 대해서도 신시역대(神市歷代)의 18대 1565년을 완전히 빼버렸고, 단군 세기 47대 2096년도 완전히 무시, 당고(唐高 = 堯)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즉위해 단군 혼자서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1908년간 살다가 중국인 기자(箕子)를 주왕(周王)이 조선왕으로 봉하자 단군께서 산신(山神)이 돼 승천했다고 했을뿐 아니라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西京), 고죽국(孤竹國)을 지금의 해주(海州)라고 단정했다.

 

이 또한 우리민족 정사를 중국사에 예속시키고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사대모화(事大慕華)로 날조한 위조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까닭에 삼국유사는 우리민족 정사(正史)가 될수 없고 근본과 뿌리를 져버리고 조국을 배반한 (忘本背源)의 죄악을 범한 망국사기(亡國史記) 때문에 이를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史)만을 유일한 정사라 믿고 이를 참고해 근거로 삼은 많은 역사서를 어찌 믿으며, 또한 우리의 올바르고 밝은 고사를 참고로 바른 사론(史論)을 전개한 이를 사문난적(邪文亂敵)이라 몰아쳐 단죄(斷罪)를 서슴치않은 무리들 손에 꾸며진 역사를 어찌 우리의 정사라 할 수 있으랴!!  

 

더욱이 조상마저 바꾸고 아비마저 배반하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강요하던 왜적(倭敵 ;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역사를 파괴 날조하려고 수많은 고전과 고사를 불태워버린 왜적의 만행속에서 살아남아 그들의 죄악을 합법화시킨 유일한 근거자료를 제공했던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겨레는 개천(開天)이래 세검 한몸이신(三神一體) 단군 한배검의 천신도(天神道)로 교를 삼고, 홍익인간*이화세계*경천숭조애인을 3대 이념으로 하고, 그 진리는 삼진귀일(三眞歸一), 반망즉진(返妄卽眞), 반진일신(返眞一神), 즉삼즉일(卽三卽一)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이요 삼일논리(三一論理)이며, 그 지향하는 끝 목적(究竟)은 민중을 교화해 밝은이(哲人)가 되게 하고(化象成哲) 속된 세상을 이화(理化)해

한울 나라로 만듬(地上仙國)에 있었으니

 

우리겨레는 신시개천이래로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 그 전통에 나라도 섰고 민족도 이루었으며 역사와 정통문화는 찬연히 빛났다. 즉, 천도를 어기는 일이 없는 지상선국(地上仙國)을 이루었다. 이로인해 군자불사(君子不死)의 나라, 예의(禮義)의 나라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계인류 문화를 선도했다. 우리의 겨레는 이러한 정신과 이념으로 이어온 겨레이지 외세에 종속당한 어용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근본도 없이 외세에 모든면에서 절대 종속 당한 채 수동적으로 일관해온 겨레가 아니다.

 

 

   3. 외세의 침입과 역사의 파괴 날조

 

    (1) 외래문화의 침투-----우리겨레는 4천여년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 고구려 말엽이나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한(漢)의 세력을 등에 업은 유교와 불교, 당(唐)의 세력을 등에 업은 도교(道敎 : 천신교의 별파)가 들어온 뒤 천신교(天神敎)를 소홀히 하기 시작 했다.

 

    (2) 천신교의 수난-----고려 태조 왕건(王建 ; 917~942)이 불교와 왕검교(王儉敎 ; 天神敎)를 국교로 한 뒤로 천신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불교가 크게 성행했다. 그러다가 고려 원종(元宗 ; 1260~1273) 때 원(元)의 세력과 함께 들어온 라마교(喇마敎)를 홍보하면서 천신교를 금압(禁壓)해 천신교의 교문은 완전히 닫기우고 말았다.

 

    (3) 천신교의 잔영-----위대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한 고려도 급작스럽게 성장, 세계 제국으로 군림한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40년동안이나 항쟁하다가 원의 압력으로 천신교는 사교라하여 탄압을 당하고 말았다. 그뒤 고려에는 유교의 성리학(性理學)이 보급되고 천신교는 민간신앙으로 스며들어 종교(宗敎)라는 이름으로 그 잔맥을 이어왔다. 이어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도 김시습(金時習)등 여러 도사들이 고신도(古神道)를 이수해 천신교의 여맥을 전했으나 세상사람들이 천신교를 모르기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온 도교(道敎)로 그릇 알고 있었다.

 

    (4) 유교의 성행과 폐단-----이씨 왕조가 서자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강행, 정주(程朱)의 성리학만을 숭상하였으므로 다른 학문을 논하다가는 사뭄난적(邪文亂敵)으로 하여 무자비한 규탄과 배격을 받았기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사상인 천신교를 무속신앙, 미신종교라며 천시.박해 하면서 유학자만을 우대했기때문에 국민은 사대모화주의(事大慕華主義 ; 중국을 사모하는 주의)로 기울고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정신을 몽땅 빼앗긴 얼빠진(失神) 민족으로 전락, 남의 정신에 사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전적이나 역사*문화가 우리것일리 없고, 정통적인 민족정사가 될리 없다.

 

 

    4. 왜적의 역사 파괴

 

 

上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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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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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왕조는 그의 정권을 보전하고 조선침략을 강행하기위해 일본 천황가가 조선에서 왔다는 역사를 음폐, 한반도를 강점하고 식민정책을 강행하면서 위사조직(僞史組織역사를 왜곡날조하던 조직)인 소위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누비며 전체 사료를 약탈, 자기들의 망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역사서 일부만 남겨놓고 전부 불태워버리고 심혈(心血)을 기울여 저희나라(일본)역사는 말할것도 없고 조선사 36권이라는 위조역사를 완성했다.

 

심지어 명치는 헌병장교 주윤모(酒윤某)에게 특명,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까지 깍고 고치는 악랄한 방법으로 역사파괴와 위조의 폭행을 감행했다. 이에 조선인은 자주독립의 힘도없고 역사도 가져본 일이 없는 야만민족이라 이민족인 위만(위만조선)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가 섰으며 단군조선의 성립은 신화로 꾸민

거짓 역사라 부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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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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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분하였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하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였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가관인 것은 자신들이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보통 조선사편수회 라고 알려짐) 를 만들어서 조선사(朝鮮史)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일제가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

-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
-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
-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날조

대륙개척사를 반도수난사로 둔갑시키고 정신적으로 고유의 주체사상을 말살하여,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놓음

단군을 하나의 신화로 돌리고, 고조선 실사(實史)를 은폐하여 고대사를 압축하고 만주하북성에서 찬란했던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

조선은 자고(自古)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억설을 주장하여 조선강점을 논리적으로 합리화 기도.

고고학계의 구석기 유물 조작 폭로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되었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짐.

<조선 총독부 3.5대 총독 시달 교육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조선사』35권 (made in Japan)

치밀한 우리의 역사 개조작업을 한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이병도였다. 그는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되었다. 이 후 이승만 정권에 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하였다.

------------------<아래 : 식민사학자 이병도와 일본인 금서룡>---------------

<이병도>
금서룡(이마니시류)의 수사관보로 들어가 우리 고대사 왜곡에 헌신적 기여를 하였고 훗날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위 신문에 난 글은 그가 죽기전에 "고조선이 신화가 아닌 실제국가"임을 고백한 기사. 조선일보 1986, 10. 9일자에 남. 이걸 가지고 제자들은 "스승이 노망들었다"며 부정함)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이병도씨 양심고백)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씨 특별기고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開天)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십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십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십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십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에 「왕이환도성경란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이라고 하였다. 혹운이하의 왕지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도왕검성의 도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왕지도왕검」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량(평토량)이 아니라 고구려의 황성(황성, 즉 환도성)의 대안인 동황성(금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인왕검지택」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야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왕검성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사기지리지고구려조에서 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래본칙흘승골성 ②사기 지일 제사조에서 「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 ③사기 열전 김유신상에서 김춘추가 강화하려고 고구려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차여본언진평왕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이일년서이월조에서 「평량은 본래 선인왕검의 댁」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일신라본기제일에 보면 「시조성 박씨‥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 조선유민분거 산곡지간위육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량이 선인(단군)왕검의 댁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세년가)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 구월산 동령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 12월정해조 류사눌(류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이세년가고지단군초도평(토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왈형국일천사십팔지금묘재아사달칙등무소처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년가합」.

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세년가를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세종대까지 단군세년가가 남아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낭(토량)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堯)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기자의 위패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는 무왕의 명으로 조선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제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북향하여 남면하고 기자보다 앞서서 입국한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이 본조의 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단군제의 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신이 기자사에서 본 서향의 좌는 진설도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와 나란히 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에 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사의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에 명하여 정척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보다는 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의 제향이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 연구 숙제

삼국유사의 단군기재는 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도 김부식의 인용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에는 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의 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의 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가 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의 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로 본 한민족 1만년 역사(1부)

 

 

 

 

 

환단고기(桓檀古記)로 본 한민족 1만년 역사(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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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동북공정 대응은  단군 조선사 복원부터

  단군 이 고대사 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역사전쟁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미 중국이 10년 전부터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포함시키기 위해 물밑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단군 이라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단군 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중국 사람들은 동북공정에 이어서 반드시  단군 까지 잡아가요. 자기네 시조로 만들고 맙니다.” (김산호 / 화백)
 
 “ 단군 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그것도 아주 문명적이고 문화적으로 뛰어난 국가를 수립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단군 조선의 연장선 위에서, 그  단군 조선의 옛 강역에서 부여나 고구려나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는 역사의 일련 과정으로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단군 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이덕일 / 역사평론가)

 

 
 일제의 역사왜곡정책에 말려든 우리 겨레


 이러한 위기의식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여기에는 일제시대 강력하게 진행된 역사왜곡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일제는 총독부 안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서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특히  단군 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2000년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단군 의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단군 을 의도적으로 말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없애고 그리고 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 하에서  단군 조선의 역사를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박성수)
 
 일제에 의해 발행된 『조선소사』1)라는 교과서를 보자.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시조인  단군 의 이야기를 ‘전설’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사천년사』2)라는 또 다른 교과서. 조선의 역사는 4000년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그 장구한 역사 자체가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면서  단군 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로 변조되었고, 그 역사마저 축소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보면 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입니다. 그것을 일제는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서 뿌리를 없애고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말하자면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에 우리가 걸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준환 회장 / 국사찾기협의회)
 
 실제 일제의 사이토 총독은  단군 과 고대사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둥으로 만들라.”(사이토가 발표한 ‘교육시책’ 중에서)
 
 “이마니시 류 이런 사람들은 『 단군 사』라든지 『 단군 고사』라든지 이런 글을 통해 그것은 신화다 또 승려 일연이 만든 망발이다 이런 식으로 봤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이병도 박사가 『삼국유사』를 해석할 때 고조선 부분을 신화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1938년부터 본격화되어서 해방될 때까지 몇 년간 한 것이 전국에 퍼져서  단군 조선 2000년 역사가 전부 신화인 것처럼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가 없어져버리는 위기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죠.” (고준환)
 
 
 식민사관 벗지 못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모든 배움의 근본이 되는 교과서. 그것은 역사의식이 없는 학생들이 왜곡된 역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어왔다. 해방 후에도 교과서는 일제 잔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단군 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 부분 축소되는가 하면 여전히 신화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역사왜곡은 크게 봐서 두 줄기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조선의 역사,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간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의미는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간을 축소시킨다는 의미는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내 평안도 일대에 국한시키려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청동기 유적을 전부 한반도로 국한시켰는데, 우리 상고사의 본무대는 만주지역의 광활한 이쪽 지역이었지 한반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우리 상고사의 무대를 좁은 한반도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국사교과서 내 청동기시대) 지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덕일)
 
 실증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 그는  단군 조선을 신화로 생각한 대표 주자다. 그러나 그런 그도 지난 1986년 한 신문을 통해서  단군 의 실존에 대해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단군 의 진면목을 찾아야 겨레의 미래도 보인다

  단군 의 역사를 확신하며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이가 있다. 바로 김산호 화백. 그는 우리 상고사의 현장인 만주를 오가며 역사 속  단군 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실물을 보진 못했어도 옛 기록을 통해 잃어버리고 왜곡된 역사의 복원을 붓끝으로 실천하고 있다.  단군 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마흔 일곱 명이다.
 
 “ 단군 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옛날(신라시대) 솔거가 그려준 할아버지의 모습만 놓고 하는데, 우리가 기마민족 아니에요! 말을 타고 적들을 하나하나 정복을 해서 거대 제국을 세울 수 있는 영웅의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씩씩한 기상에 맞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복장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 모습도 바뀌어야 합니다.” (김산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고 밝혀지고 있는 치우천황. 전쟁에 나서면 절대 패하지 않는 불패의 왕으로 이미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기도 했었다. 화가로서 우리의 상고사가 그림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한다.
 
 93년  단군 릉 발견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북한. 그렇듯  단군 은 남과 북을 잇는 다리가 돼가고 있다. 오늘날  단군 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구심점이 없다는 거요. 어떤 구심점이 있어서 우리 국민이 하나로 화합을 해야지 지금처럼 열두 쪽 나서 잘 될 건 아무 것도 없어요.”(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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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단고기(桓檀古記) 내용인 9000년 한민족사의

역대 왕 계표(歷代 王 系票)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란 지금의 대통령과 같은 직함을 말하는 것임.

       역대 왕 계표(歷代 王 系票)    

* 2005년 올해는 환기(桓紀)로 9202년(7197년+서기2005년)이

   된다. 환기로 환산하려면 서기년에다 7197년을 더하면된다.


⊙ 올해(2005년)가 단기檀紀4338년(서기2005년+2333년)인데,

단군조선 2,096년동안의 역사(단군檀君 47분께서 통치),

⊙ 단군조선 그 이전의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배달국 1565년 동

    안의 역사(환웅천황桓雄天皇 18분께서 통치)

⊙ 환웅천황 이전의 환인시대 3,301년(환인桓仁天帝 7분께서

    통치)의 역사가 있다.

* 아래의 왕 계표를 환기(桓紀)로 환산하여 기재한 것이니 독자

   여러분들의 동조를 구한다.   

   2005년12월  일 <필자>

  
   
    
   

(1) 환국(桓國) 환인계표
  왕명 : 환인(桓因) - 7대 3301년(환기 1 ~ 3301, BC7198 ~ BC3898)

   왕    명

즉위년도(환기-B.C)

   약    사

1

안파견(安巴堅)

1-BC7198

 

2

혁  서(赫胥)

 

서방 만리에 환국의 법을 전한 광서제가 있었다.

3

고시리(古是利)

 

700년(수명)

4

주우양(朱于襄)

 

발귀리가 있어 동방 삼역에 삼의법을 전함.

5

석제임(釋提壬)

 

 

6

구을리(邱乙利)

 

 하늘에 제를 올리는 "소도제천"시작.삼묘산 아래에 "서자부(庶子部)"를 세웠음."아랑 아랑 아르리 아르이고"천해를 떠나면서 부른 노래

7

지위리(智爲利)

3301-BC3898

 


(2) 배달국 한웅계표
 왕명 : 환웅(桓雄) ,천왕(天王 ) - 18대 1565년 (한기 3301 ~ 4866, BC3898 ∼ BC2333)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재위
기간

   사

1

거발한(居發桓)

3301-BC3898

94

한인의 명을 받고 한웅께서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의 나무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2

거불리(居佛理)

3394-BC3804

86

 

3

우야고(右耶古)

3480-BC3718

99

 

4

모사라(慕士羅)

3579-BC3619

107

 

5

태우의(太虞儀)

3686-BC3512

93

12아들중 막내 아들이 복희(중국시조3황중1인)이다.여와씨는 딸

6

다의발(多儀發)

3779-BC3419

98

 

7

거  련(居連)

3877-BC3321

81

 

8

안부련(安夫連)

3958-BC3240

73

 

9

양  운(養雲)

4031-BC3167

93

 

10

갈  고(葛古)

4127-BC3071

100

 독로한

11

거야발(居耶發)

4227-BC2971

92

 

12

주무신(州武愼)

4319-BC2879

105

 

13

사와라(斯瓦羅)

4424-BC2774

67

 

14

자오지(慈烏支)

4491-BC2707

109

일명 치우천왕.황제 헌원과의 10년 73회의 전쟁을 모두승리로 이끌고 헌원을 복속시킴.중원 최고의 전쟁신으로 오늘날까지 추앙 받고 있다.

15

치액특(蚩額特)

4600-BC2598

89

 

16

축다리(祝多利)

4689-BC2509

56

 

17

혁다세(赫多世)

4745-BC2453

72

 일명 홍제

18

거불단(居弗檀)

4817-BC2381

48

 일명 단웅(檀雄).단군왕검은 단웅의 아들이다.

단군조선으로
(4865-BC2333)


(3) 단군조선 왕계표(진한)
  왕명 : 단군(檀君),천자(天子),천왕(天王),천제(天帝)-47대 2096년(한기4865 ∼ 6960, BC2333 ∼ BC238)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재위기간

   약    사

1

왕검(王儉)

(4865-BC2333) 

93

단웅과 웅씨녀사이에서 태어남. 신인 왕검이 무진년(b.c.2333) 오가와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러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니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다.

2

부루(扶婁)

(4958-BC2240)

58

 BC2239 소련 대련 3년상.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듬.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3

가륵(嘉勒)

(5016-BC2182)

45

일명 읍루. 삼랑 을보록이 정음38자(가림토 문자) 제작.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이 배달유기를 편수

4

오사구(烏斯丘)

(5061-BC2137)

38

 산삼발견.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 을 몽골리한(한은 임금의 뜻)으로 봉하다.

5

구을(丘乙)

(5099-BC2099)

16

양가(羊加)구을이 즉위.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듬

6

달문(達門)

(5115-BC2083)

36

우가(牛加)인 달문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이음 .육십갑자 사용(BC2096)

7

한율(翰栗)

(5151-BC2047)

54

양가(羊加)인 한율이 즉위.

8

우서한(于西翰)

(5205-BC1993)

8

우가인 서한 즉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9

아술(阿述)

(5213-BC1985)

35

양가(羊加).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10

노을(魯乙)

(5248-BC1950)

59

우가인 노을이 즉위. 신원목(신문고와 같은 역할) 설치(BC1946)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중국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팡괴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괘의 시초라 하고 삼서성의 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 같은 것이었다.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천문대)을 두었다.

11

도해(道奚)

(5307-BC1891)

57

우가(牛加).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12

아한(阿漢)

(5364-BC1834)

52

우가 아한이 즉위.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13

흘달(屹達)

(5416-BC1782)

61

우가 흘달이 즉위.대음달. 하 정벌. 무술 5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14

고불(古弗)

(5477-BC1721)

60

우가인 고불이 즉위.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1억 8천만인 이였다.

15

대음(代音)

(5537-BC1661)

51

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16

위나(尉那)

(B5588-C1610)

58

우가인 위나가 즉위.

17

여을(余乙)

(5646-BC1552)

68

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18

동엄(冬奄)

(5714-BC1484)

49

 

19

구모소(구牟蘇)

(5763-BC1435)

55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20

고홀(固忽)

(5818-BC1380)

43

우가인 고흘이 즉위.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21

소태(蘇台)

(5861-BC1337)

52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 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22

색불루(索弗婁)

(5913-BC1285)

48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23

아홀(阿忽)

(5961-BC1237)

76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24

연나(延那)

(6037-BC1161)

11

태자 연나가 즉위하여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25

솔나(率那)

(6048-BC1150)

88

영나의 아우.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26

추로(鄒魯)

(6136-BC1062)

65

태자 추로가 즉위

27

두밀(豆密)

(6201-BC997)

26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8

해모(奚牟)

(6227-BC971)

28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9

마휴(摩休)

(6255-BC943)

34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30

내휴(奈休)

(6289-BC909)

35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31

등올(登올)

(6324-BC874)

25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32

추밀(鄒密)

(6349-BC849)

30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33

감물(甘勿)

(6379-BC819)

24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34

오루문(奧婁門)

(6403-BC795)

23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35

사벌(沙伐)

(6426-BC772)

68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

매륵(買勒)

(6494-BC704)

58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일본 서기는 이사람을 神武王(신무왕)이라며 건국시조로 날조하여 떠받들고 있다.]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37

마물(麻勿)

(6552-BC646)

56

 

38

다물(多勿)

(6608-BC590)

45

 

39

두홀(豆忽)

(6653-BC545)

36

 

40

달음(達音)

(6689-BC509)

18

 

41

음차(音次)

(6707-BC491)

20

 

42

을우지(乙于支)

(6727-BC471)

10

 

43

물리(勿理)

(6737-BC461)

36

을묘 3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장당경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

구물(丘勿)

(6773-BC425)

29

병진 원년(BC 425) 3월 우화충을 죽임.백민성의 욕살구믈 즉위.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45

여루(余婁)

(6802-BC396)

55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46

보을(普乙)

(6857-BC341)

46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고열가가 43대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

고열가(高列加)

(6903-BC295)

57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2,096년이라 임술 57년고열가 단제께서 조선 폐관하시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

조선폐관
(6960-BC238)


(4) 마한국 마한계표
  (왕명 : 마한(馬韓) - 35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약                    사

1

웅백다(熊伯多)

 재위55년

단군 왕검에 의해 마한국에 봉함을 받음.
달지국에 도읍(백아강 이라고도함) 단군왕검51년 마리산에 제천의단 축조

2

노덕리(盧德利)

 

 

3

불여래(弗如來)

(4969-BC2229)

 2대단군 부루12년 임자 가을 10월. 병진년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4

두라문(杜羅門)

(5018-BC2180)

 3대 가륵3년

5

을불리(乙弗利)

 

 

6

근우지(近于支)

(5062-BC2136)

 4대오사구 을유년

7

을우지(乙于支)

(5091-BC2107)

 

8

궁호(弓戶)

 

을우지의 동생. 

9

막연(莫延)

 

두라문의 동생 두라시의 2대손.

10

아화(阿火)

(5259-BC1939)

막연의 동생(10대노을 임인년 )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의 훈을 강론하게 하니, 하나라의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11

사리(沙里)

(5334-BC1864)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12

아리(阿里)

(5392-BC1806)

사리의 동생.12대아한 을묘년

13

갈지(曷智)

(5482-BC1716)

14대고불 을유년

14

을아(乙阿)

(5565-BC1633)

15대대음 무신년

15

두막해 (豆莫亥)

(5648-BC1550)

17대여을 신미년. 임신년 3월16일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 하나라 왕 외임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16

독로(瀆盧)

(5726-BC1472)

 

17

아루(阿婁)

(5827-BC1371)

고흘 경오년

18

아라사(阿羅斯)

(5875-BC1323)

아루의 동생.

19

여원흥(黎元興)

 

조선의 욕살로 색불루에 의해 마한으로 임명.

20

아실(阿實)

(5966-BC1232)

 

21

아도(阿도)

 

아실의 동생.

22

아화지(阿火只)

(6167-BC1031)

 

23

아사지(阿斯智)

(BC995)

아화지의 동생.

24

아리손(阿里遜)

(6264-BC934)

아화지의 아들.

25

소이(所伊)

 

 

26

사우(斯虞)

(6384-BC814)

 

27

궁홀(弓忽)

(6461-BC737)

 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28

동기(東杞)

 

 

29

다도(多都)

(6610-BC588)

 

30

사라(斯羅)

(6689-BC509)

 

31

가섭라(迦葉羅)

 

 

32

가리(加利)

 

 

33

전내(典奈)

(6673-BC425)

가리의 손자.병진년에 상장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임.

34

진을례(進乙禮)

 

 

35

맹남(孟男)

 

마한의 멸망 시기는 알지 못한다. 진한의 멸망을 전후하여 마한도 멸망하였다고 추정할 뿐이다.


(5) 번한국 번한계표
 왕명 : 번한 - 74대 ? (? ∼ BC194)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약                    사

1

치두남(蚩頭男)

 

 

2

낭야(琅耶)

(4887-BC2311)

 

3

물길(勿吉)

(4960-BC2238)

 

4

애친(愛親)

(5011-BC2187)

 

5

도무(道茂)

 

 

6

호갑(虎甲)

(5100-BC2098)

 

7

오라(烏羅)

(5126-BC2072)

 

8

이조(伊朝)

(5183-BC2015)

 

9

거세(居世)

(5223-BC1965)

이조의 동생.

10

자오사(慈烏斯)

(5238-BC1960)

 

11

산신(散神)

(5252-BC1946)

 

12

계전(季佺)

(5305-BC1893)

 

13

백전(伯佺)

(5334-BC1864)

 

14

중전(仲佺)

(5372-BC1826)

백전의 동생.

15

소전(少佺)

(5428-BC1770)

 

16

사엄(沙奄)

(5471-BC1727)

 

17

서한(棲韓)

 

사엄의 동생.

18

물가(勿駕)

(5534-BC1664)

 

19

막진(莫眞)

(5538-BC1660)

 

20

진단(震丹)

(5584-BC1614)

 

21

감정(甘丁)

(5590-BC1608)

 

22

소밀(蘇密)

 

 

23

사두막(沙豆莫)

 

 

24

갑비(甲飛)

 

사두막의 배다른 아버지이다.

25

오립누(烏立樓)

 

 

26

서시(徐市)

 

 

27

안시(安市)

(5805-BC1393)

 

28

해모라(奚牟羅)

(5846-BC1352)

 

29

소정(小丁)

(5865-BC1333)

소태 단군이 우사 소정을 번한으로 임명.

30

서우여(徐于餘)

 

단군 색불루가 번한에 임명. 수유족

31

아락(阿洛)

(5974-BC1224)

(수유족에 의해 일시 점령되었던 번한을 번한족이 되 찾았다.)

32

솔귀(率歸)

(6014-BC1184)

 

33

임나(任那)

(6061-BC1137)

 

34

노단(魯丹)

(6093-BC1105)

임나의 동생.

35

마밀(馬密)

(6106-BC1092)

 

36

모불(牟弗)

(6124-BC1074)

 

37

을나(乙奈)

(6144-BC1054)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38

마휴(摩休)

(6184-BC1014)

 

39

등나(登那)

(6186-BC1012)

마휴의 동생.삼년상의 제도를 시행

40

해수(奚水)

(6215-BC983)

 

41

오문루(奧門婁)

(6256-BC942)

 

42

누사(婁沙)

(6304-BC894)

 

43

이벌(伊伐)

(6332-BC866)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침.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44

아륵(阿勒)

(6358-BC840)

 

45

마휴(麻休)

(6362-BC836)

 

46

다두(多斗)

(6413-BC785)

 

47

내이(奈伊)

(6446-BC752)

 

48

차음(次音)

(6476-BC722)

 

49

불리(不理)

(6522-BC676)

 

50

여을(余乙)

(6522-BC676)

 

51

엄루(奄婁)

(6522-BC647)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52

감위(甘尉)

 

 

53

술리(述理)

(6585-BC613)

 

54

아갑(阿甲)

(6595-BC603)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55

고태(固台)

(6610-BC588)

 

56

소태이(蘇台爾)

(6624-BC574)

 

57

마건(馬乾)

(6642-BC556)

 

58

천한(天韓)

(6653-BC545)

 

59

노물(老勿)

(6663-BC535)

 

60

도을(道乙)

(6678-BC520)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이요, 이름은 건이니 그의 선조는 풍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겼다

61

술휴(述休)

(6693-BC505)

 

62

사양(沙良)

(6727-BC471)

 

63

지한(地韓)

(6745-BC453)

 

64

인한(人韓)

(6760-BC438)

 

65

서울(西蔚)

(6798-BC400)

 

66

가색(可索)

(6823-BC375)

 

67

해인(解仁)

(6857-BC341)

산한(山韓) 연나라 자객에게 피살

68

수한(水韓)

(6858-BC340)

 

69

기후(箕후)

(6875-BC323)

일명 기자조선의 시작으로 수유족이다.
수한을 이어 스스로 번한에 올랐다.

70

기욱(箕煜)

 

 

71

기석(箕釋)

(6908-BC290)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72

기윤(箕潤)

(6947-BC251)

 

73

기비(箕丕)

(6966-BC232)

 

74

기준(箕準)

(6977-BC221)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 146)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7004(BC194)년 번한 멸망.

번한멸망
(7004-BC194)


(6) 북부여 단군계표
왕명 : 단군 - 7대 (6959~?, BC239∼?)  

       왕        명

즉위(한기-B.C)

           약                    사

1

해모수(解慕漱)

(6959-BC239)

본래 고리국 사람으로. 즉위 8년(B.C232년)에 五加(오가)들에 의해단군으로 추대됨.

2

모수리(慕漱離)

(7004-BC194)

 

3

고해사(高奚斯)

(7029-BC169)

 

4

고우루(高于婁)

(7078-BC120)

해우루(解于婁)

5

고두막(高豆莫)

(7090-BC86)

동명(東明), 졸본사람. 7090(BC108)년에 즉위하더니, 이때에 부여를 계승하였다.

6

고무서(高無胥)

(7139-BC59)

 

7

고주몽(高朱蒙)

(7138-BC58)

해모수의 아들 고구려후 고진의 3세손으로 고무서의 사위로 이어서 고구려의 시조인추모 즉 동명성왕이다.

 * 일반적으로 1대에서 4대까지를 북부여 5대 이후를 졸본부여라 나누어 부른다.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
  왕명 : 단군 - 3대 108(한기7112 ~ 7219, BC86∼AD22)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재위기간

               약                    사

1

해부루(解夫婁)

(7112-BC86)

39

7111년고우루가 죽자 동생으로 왕위에올랐으나, 고두막에게 쫓기어 가섭원에 나라를 열었다.

2

금와(金蛙)

(7151-BC47)

41

 

3

대소(帶素)

 (7192-BC8)
(망7219-AD22)

27

7219(AD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


(7) 고구려 왕계표
 왕명 : 왕, 태왕(太王), 대왕(大王), 열제(烈帝) - 성(性) : 고(高) - 28대 705년(7161~7865, BC37∼서기668)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연호

재위기간

               약                    사

1

추모(芻慕)

7161-BC37

 다물

18

名은 주몽(朱蒙), 추모. 해모수의 4세손. 父는 불리지, 母는 하백의 딸 유화.

2

유리명(琉璃明)

7179-BC19

 

37

名은 유리, 유류(孺留), 여율(북사). 母는 예씨부인.

3

대무신(大武神)

7215-18

 

26

대해주류왕. 名은 무휼(無恤), 막래(북사).母는 다물국 송양의 딸 송씨부인.

4

민중(閔中)

7241-44

 

4

名은 해색주(解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5

모본(慕本)

7245-48

 

5

名은 해우(解憂), 해애루. 대무신왕의 원자.

6

태조(太祖)

7250-53

 융무

93

국조왕. 名은 궁(宮). 유리왕의 2대손. 융무(隆武)

7

차대(次大)

7343-146

 

19

名은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명림답부에게 죽음

8

신대(新大)

7362-165

 

14

名은 백고(伯固) , 백구(伯句). 태조왕의 막내동생.

9

고국천(故國川)

7376-179

 

18

名은 남무(男武), 이이모(북사). 신대왕의 2자

10

산상(山上)

7394-197

 

30

名은 연우(延憂) ,위궁(位宮).신대왕의4자(형 발기를 제끼고 왕이되어 형 발기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죽음)선황후우(형수)를 황후로 맞이함.을파소 참전계경

11

동천(東川)

7424-227

 

21

동양왕. 名은 우위거(憂位居).

12

중천(中川)

7445-248

 

22

중양왕. 名은 연불(然弗).

13

서천(西川)

7467-270

 

22

서양왕. 名은 약노(藥盧) , 약우(若友).

14

봉상(烽上)

7489-292

 

8

치갈왕. 名은 상부(相夫) , 삽시루.

15

미천(美川)

7497-300

 

31

호양왕. 名은 을불(乙弗) , 우불(憂弗).
서천왕2대손. 父는 고추가 돌고.

16

고국원(故國原)

7528-331

永和

40

국강상왕. 名은 사유(斯由) , 쇠(釗).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교전중 사망.

17

소수림(小獸林)

7568-371

 

13

소해주류왕. 名은 구부(丘夫).

18

고국양(故國壤)

7581-384

 

8

名은 이련(伊連) , 지지(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19

광개토(廣開土)

7589-392

영락

21

광개토경호태왕, 名은 담덕(談德).

20

장수(長壽)

7610-413

건흥

79

장수홍제호태열제,名은 거련(巨連). 475년 백제 한성으로 공격하여 개로왕 주살.

21

문자명(文咨明)

7689-492

명치

27

문자호태열제,名은 나운(羅雲).장수왕 2대손.父는 조다(助多).

22

안장(安藏)

7716-519

 

12

名은 흥안(興安).

23

안원(安原)

7728-531

 

14

名은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24

양원(陽原)

7742-545

 

14

양강왕. 名은 평성(平成).

25

평원(平原)

7756-559

대덕

31

평강상호태열제. 名은 양성(陽成), 탕(북사).

26

영양(拏陽)

7787-590

홍무

28

영양무원호태열제, 名은 원(元), 대원.사서 <신집>5권 편찬.수나라 양왕 광의113만 대군을 대장군 을지문덕이 물리침.

27

영류(營留)

7815-618

 

24

名은 건무(建武),성(成)영양왕의 이복동생.연개소문에게 죽음

28

보장(寶藏)

7839-642

개화

26

名은 장(臧). 영류왕의 아들 태양왕의 아들로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당 이세민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의 세아들 남생,남건,남산의 분란으로 7865(AD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65-668

 


(8) 백제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性) : 부여(夫餘) - 32대 678년 (한기7180~7857, BC18∼서기660)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소서노(召西努)

7156-BC42

 

고구려의 신하 연타발의 딸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BC31)년에 고구려에 의해 제후로 인정. 

1

온조(溫祚)

7180-BC18

45

고주몽의 아들. 형은 비류(沸流).

2

다루(多婁)

7225-28

49

온조왕의 맏아들.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

3

기루(己婁)

7274-77

51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蓋婁)

7325-128

38

기루왕의 아들. 북한산성을 쌓았다.

5

초고(肖古)

7363-166

48

소고(素古).개루왕의 아들.

6

구수(仇首)

7411-214

20

귀수(貴須). 204년 위구태의 구태백제에 복속하여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됨

7

사반(沙伴)

7435-234

1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이 너무어려 정사를 볼 능력이 없어 폐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름

8

고이(古)

7436-234

52

초고왕의 아우.

9

책계(責稽)

7483-286

12

고이왕의 아들. 청계(靑稽).AD298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10

분서(汾西)

7495-298

6

책계왕의 맏아들

11

비류(比流)

7501-304

40

구수왕의 아들. 

12

설(契)

7541-344

2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近肖古)

7543-346

29

비류왕의 둘째아들. 고구려 평양성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살해. 고흥이 서기 집필

14

근구수(近仇首)

7572-375

9

휘수(諱須).

15

침류(枕流)

7581-384

1

근구수왕의 맏아들.

16

진사(辰斯)

7582-385

7

근구수왕의 둘째아들.

17

아신(阿莘)

7589-392

13

아방(阿芳).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전支)

7602-405

15

직지(直支). 혹은 여영.아신왕의 맏아들.

19

구이신(久爾辛)

7617-420

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毗有)

7624-427

28

구이신왕의 맏아들.

21

개로(蓋鹵)

7652-455

20

근개루(近蓋婁). 名은 경사(慶司).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아차산에서 사망(475년)

22

문주(文周)

7672-475

2

개로왕의 아들.웅진으로 도읍을 옮김.병관좌평 해구에 의해죽었다.

23

삼근(三斤)

7674-477

2

임걸(壬乞). 문주왕의 맏아들.

24

동성(東城)

7676-479

22

名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 문주왕의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25

무령(武寧)

7698-501

22

名은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아들.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26

성(聖)

7720-523

31

名은 명농(明농).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27

위덕(威德)

7751-554

44

名은 창(昌).

28

혜(惠)

7795-598

1

名은 계(季). 성왕의 둘째아들.

29

법(法)

7796-599

1

名은 선(宣) 혹은 효순(孝順).

30

무(武)

7797-600

41

名은 장(璋).

31

의자(義慈)

7838-641

19

7857(AD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57-660


(9) 신라 왕계표
 왕명 : 거세간(居世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 왕(王)
  성(性) : 박(朴),석(昔),김(金) -56대 992년 (한기7141~8132, BC57 ∼ 서기935)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왕호칭

         약                    사

1

혁거세(赫居世)

7141-BC57

 61

거세간

나이 13세에 양산촌등 6부 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2

남해(南解)

7202-5

 19

차차웅

혁거세의 아들.

3

유리(儒理)

7221-24

 33

이사금

남해의 아들.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부의 성(姓)을 하사.관직을 이벌찬등 17등급으로 제정 시행.

4

탈해(脫解)

7254-57

 23

이사금

토해(吐解).남해의 사위.김알지 탄생

5

파사(婆娑)

7277-80

 32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

지마(祇摩)

7309-112

 22

이사금

지미(祇味). 파사의 아들

7

일성(逸聖)

7331-134

 20

이사금

유리의 큰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다.

8

아달라(阿達羅)

7351-154

 30

이사금

일성의 맏아들.

9

벌휴(伐休)

7381-184

 12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

나해(奈解)

7393-196

 34

이사금

벌휴의 손자.

11

조분(助賁)

7427-230

 17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

첨해(沾解)

7444-247

 15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

미추(味鄒)

7459-262

 21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14

유례(儒禮)

7480-283

 15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

기림(基臨)

7495-298

 12

이사금

기립(基立)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걸숙(乞淑)

16

흘해(訖解)

7507-310

 46

이사금

나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 (于老).

17

내물(奈勿)

7553-356

 46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

18

실성(實聖)

7599-402

 15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대서지 이찬

19

눌지(訥祗)

7614-417

 41

마립간

내물의 아들.

20

자비(慈悲)

7655-458

 21

마립간

눌지의 맏아들.

21

소지(炤知)

7676-479

 21

마립간

비처(毗處).자비의 맏아들.

22

지증(智證)

7697-500

 14

마립간

名은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寶)의 아들.

23

법흥(法興)

7711-514

 26

名은 원종(原宗).

24

진흥(眞興)

7737-540

 36

名은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 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25

진지(眞智)

7773-576

 3

名은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

진평(眞平)

7776-579

 53

名은 백정(白淨).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27

선덕(善德)

7829-632

 15

名은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28

진덕(眞德)

7844-647

 7

名은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29

무열(武烈)

7851-654

 7

名은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
(龍春)의 아들. 백제를 멸망 시킴(A.D 660)

30

문무(文武)

7858-661

 20

名은 법민(法敏). 무열의 원자.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

31

신문(神文)

7878-681

 11

名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

효소(孝昭)

7889-692

 10

名은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

성덕(聖德)

7899-702

 35

名은 흥광(興光)신문의 둘째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

효성(孝成)

7934-737

 5

名은 승경(承慶)성덕의 둘째 아들

35

경덕(景德)

7939-742

 23

名은 헌영(憲英)효성 이복 동생

36

혜공(惠恭)

7962-765

 15

名은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

선덕(善德)

7977-780

 5

名은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
으로 아버지는 사찬 효방(孝芳).

38

원성(元聖)

7982-785

 14

名은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

소성(昭聖)

7996-799

 1

名은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

애장(哀莊)

7997-800

 9

名은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

헌덕(憲德)

8006-809

 17

名은 언승(彦昇)소성의 동복아우

42

흥덕(興德)

8023-826

 10

名은수종(秀宗)헌덕의동복아우

43

희강(僖康)

8033-836

 2

名은 제륭(悌隆).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

민애(閔哀)

8035-838

 1

名은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

신무(神武)

8036-839

 

名은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

46

문성(文聖)

8036-839

 18

名은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

헌안(憲安)

8054-857

 4

名은 의정(誼靖)신무의이복아우

48

경문(景文)

8058-861

 14

名은 응렴(膺廉)희강의아들아찬 계명
(啓明)의 아들

49

헌강(憲康)

8072-875

 11

名은 정(晸). 경문의 태자.

50

정강(定康)

8083-886

 1

名은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

진성(眞聖)

8084-887

 10

名은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

효공(孝恭)

8094-897

 15

名은 요(嶢). 헌강의 서자.

53

신덕(神德)

8109-912

 5

名은 경휘(景暉). 아달라왕 (阿達羅王)의 후손

54

경명(景明)

8114-917

 7

名은 승영(昇英).신덕의 태자.

55

경애(景哀)

8121-924

 3

名은 위응(魏膺)경명의동복아우.

56

경순(敬順)

8124-927

 8

名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8132(AD935)년 나라를 고려에 넘기었다.

(멸망)
8132-935


(10)가야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性) : 김(金) - 10대 520년(한기7239~7759, 서기42 ∼ 562)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1

수로(首露)

7239-42 

157

 

2

거등(居登)

7396-199

54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3

마품(麻品)

7450-253 

38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4

거즐미(居叱彌)

7488-291

55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

이시품(伊尸品)

7543-346 

61

혹은 이품(伊品).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6

좌지(坐知)

7604-407 

14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7

취히(吹希)

7618-421 

30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8

질지

7648-451

41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9

겸지(鉗知)

7689-492

29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10

구형(仇衡)

7718-521

41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침략으로 멸망.

       (멸망)
     7759-562

* 좌지왕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11) 대진국(발해) 왕계표
 왕명 : 제(帝),황제(皇帝) - 성(性) : 대(大) - 15대 259년 (한기7865~8123, 서기668 ∼926)

         왕               명

연호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
기간

     명

       약                사

 묘호(廟號)

      시 호(諡號)

1

세조(世祖)

진국열황제皇帝

중광

7865-668 

31

중상(仲象)

후고구려로 개국

2

태조(太祖)

성무고황제皇帝

천통

7896-699 

20

조영(祚榮)

대진국으로 개명

3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인안

7916-719 

19

무예(武藝)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4

세종(世宗)

광성문황제皇帝

대흥

7935-738 

56

흠무(欽茂)

국사 25권 편찬

5

대원의(大元義)

 

 

7991-794 

 

 

세종의 아우.포악하여 바로쫏겨남

6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중흥

7991-794 

1

화여(華璵)

세종의 아들인 굉림 (宏臨)의 아들.

7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정력

7992-795 

14

숭린(崇璘)

인종의 황숙(皇叔).

8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영덕

8006-809

3

원유(元瑜)

 

9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주작

8009-812

5

언의(言義)

 

10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태시

8014-817

1

명충(明忠)

 

11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건흥

8015-818

14

인수(人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4세손.

12

장종(莊宗)

화황제(화皇帝)

함화

8029-832

26

이진(尋震)

 

13

순종(順宗)

안황제(순皇帝)

대정

8055-858

14

건황(虔晃)

 

14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

8069-872

29

현석(玄錫)

 

15

 

애황제(哀皇帝)

청태

8098-901

25

   인선

8123(AD926)년 요에 의해 멸망.

(멸망) 8123-926


 
 (12)고려 왕계표
   왕명:제(帝),왕(王) -성(性):왕(王) 34대 474년( 한기8115~8589, 서기918~1392 )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1

태조(太祖)

     8115-918   

25

이름은 왕건(王建). 궁예의 폭정으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2

혜종(惠宗)

8140-943

2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3

정종(定宗)

8125-945

4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8146-949

26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5

경종(景宗)

8172-975

6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6

성종(成宗)

8178-981

16

휘는 치(治).字는 溫古이니 載宗의 第2子이며 母는 宣義太后 柳氏이다. 팔관회를 폐지함.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7

목종(穆宗)

8195-997

12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8

현종(顯宗)

8206-1009

22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9

덕종(德宗)

8228-1031

3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10

정종(靖宗)

8231-1034

12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

문종(文宗)

8243-1046

37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12

순종(順宗)

8280-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

선종(宣宗)

8280-1083

11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

헌종(獻宗)

8291-1094

1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15

숙종(肅宗)

8292-1095

10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

예종(睿宗)

8302-1105

17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17

인종(仁宗)

8319-1122

24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18

의종(毅宗)

8343-1146

24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19

명종(明宗)

8367-1170

2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20

신종(神宗)

8394-1197

7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21

희종(熙宗)

8401-1204

7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22

강종(康宗)

8408-1211

2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23

고종(高宗)

8410-1213

46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24

원종(元宗)

8456-1259

15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25

충렬왕(忠烈)

8471-1274

34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26

충선왕(忠宣)

8505-1308

5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27

충숙왕(忠肅)

8510-1313

17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8529-1332

7

28

충혜왕(忠惠)

8527-1330

2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8536-1339

5

29

충목왕(忠穆)

8540-1344

4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30

충정왕(忠定)

8545-1348

3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31

공민왕(恭愍)

8548-1351

23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32

우왕(禑)

8571-1374

14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33

창왕(昌)

8585-1388

1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쫓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쫓겨나 10세때 시해됨.

34

공양왕(恭讓)

8586-1389

3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멸망)
8589-1392


  
(13) 조선 왕계표
    왕명:왕(王) - 성(性):이(李) 27대 518년(한기8589~9107, 서기1392~1910) )

   왕        명

즉위년도

재위기간

               약                                      사

1

태조(太祖)

8589-1392

   6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8595-1398

   2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3

태종(太宗)

8597-1400

  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8615-1418

  32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5

문종(文宗)

8647-1450

   2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6

단종(端宗)

8649-1452

   3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7

세조(世祖)

8652-1455

  13

휘는 유.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오른 수양대군.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8

예종(睿宗)

8665-1468

   1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9

성종(成宗)

8666-1469

  25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연산군(燕山君)

8691-1494

  12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11

중종(中宗)

8703-1506

  38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12

인종(仁宗)

8741-1544

   1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명종(明宗)

8742-1545

  22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14

선조(宣祖)

8764-1567

  41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15

광해군(光海君)

8805-1608

  15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인조(仁祖)

8820-1623

  26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17

효종(孝宗)

8846-1649

  10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현종(顯宗)

8856-1659

  15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숙종(肅宗)

8871-1674

  46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20

경종(景宗)

8917-1720

   4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영조(英祖)

8921-1724

  52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22

정조(正祖)

8973-1776

  24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23

순조(純祖)

8997-1800

  34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24

헌종(憲宗)

9031-1834

  15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25

철종(哲宗)

9046-1849

  14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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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한국문명의 세계전파

 

 

 

 

1번 고대한국(환국) - 한인(환인)님의 나라

2번 배달국 - 한웅(환웅)님의 나라

3번 고조선

 

 

출처 -  '헬리코박터균'의 분포로 본 과거의 인류이동

(Traces of Human Migrations in Helicobacter pylori Populations)

 

- 세계최고의 학술지라는 사이언스 2003년 3월 7일자에 실린 연구논문

 

 

 

 

 

 

[헬리코박터균]의 유전적 분포 지도 (노란색이 동아시아 고유의 헬리코박터균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 ) [헬리코박터균]는 사람의 위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아시아의 어떤 사람들이 어느 곳(바이칼호수 주변 추정)에서 오래도록 고립되어 살아서 생긴 [동아시아 고유의 헬리코박터균] (노란색으로 표시) 를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 만주, 중국 북동부에 가장 많은 비율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인디언이 되었으며(13번 , 14번) 더욱 내려가 남미 인디오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16번 , 17번)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고유의 유전자가 없고 오로지 동아시아형 고유 유전자만이 있다는 것이 같은 논문에 나오는 아래 표입니다.  

 




 

위의 표에 에 보면 1번이 한국인데 특히 한국인들에게서는 오로지 동북아시아 고유유전자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바이칼호수 주변으로 추정되는 [고대한국]에서 내려온 분들의 직계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단군신화는 그 분들을 [환웅(한웅)님과 그 일행]으로 표현 했고, 그 때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계시던 분들(예맥족)은 [웅녀님과 그 부족]으로 표현 했습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은 '곰을 상징동물로 하던 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 부족은 지도자가 대체로 여성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홍산문화 유물참조)

 

 

즉 한국인은 시베리아에서 오신 분들인 [환웅(한웅)님과 그 일행]과 원래 만주 한반도에 살던 [웅녀님의 부족]이 만나서 생긴 민족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고 비교적 근래까지 시베리아는 예를들어 러시아 , 중국 등 현재 있는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이언스 2003년 4월 25일 자에 발표된 [농사와 언어의 최초의 전파( Farmers and Their Languages: The First Expansions)] 라는 제목의 논문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농사와 언어의 최초의 전파]

 

위 그림은 모든 문명과 언어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까지는 보여주지 못하고 지금 사람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바탕으로 대강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너무 부족한 그림이지만 [알타이어의 사용범위]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금은 할 수 없이 이 그림을 인용하겠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아도 원래 만리장성 위의 시베리아-만주는 중국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위 그림에도 나오듯이 한국어는 원래 바이칼 호수 부근 지역에서 쓰던 [알타이어]가 전해져 온 것이고 그 언어와 문명을 가지고 온 분들이 대표적으로 [환웅(한웅)님과 그 일행] 이라 하겠습니다. 대략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시베리아-만주-한국어 즉 알타이어와 중국어가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고대에 [시베리아 -만주]에서 중앙아시아와 중동(아랍)으로 언어와 농사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이동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어디선가 놀라운 문명(예를 들어 금속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드러났고(당시 그 지역은 원시석기시대) 그 사람들은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들 (Black Headed People)] 이었으며 골격등으로 보아 동아시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 결과 입니다.   

 



 5천년전에 만들어진 수메르 왕조 지도자 '구데아(gudea)'의 인물상 입니다.
동북아시아인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요^^ 또한 고대 수메르의 언어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는 시리아 등의 말은 고대 시베리아-만주에서 쓰던 알타이어에서 나온 말로 드러나고 이는 수메르의 말이 고대 시베리아-만주의 말과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메르 말은 중국어와는 같은 점이 별로 없고 한국어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합니다. 위그림에서도 그러한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수메르인들은 말은 한국어와 비슷한데 글자는 원시한자 같은 것을 쓴 것 같습니다.

 

 

 

 

초기 수메르 문자가 초기 한자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중국신화통신은 2001년 7월 9일에 만주 북서부 지역에서 최소한 5천년 이상 전의 피라미드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피라미드에서 한자로 米(쌀 미)이 새겨져있는 많은 도자기의 파편들을 발견했다고 보도 했습니다.

 

이로써 한자도 중국보다 시베리아-만주에서 먼저 썼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메르인들은 말도 글자도 시베리아-만주 에서 쓰던 것을 썼던 것입니다.

머리카락도 까맣고요.

 

 

<<<<위의 글은 산재해 있는 자료를 모아 강동수<민초>가 한데 모으기만 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 ◈ 민초들의 향기마을 ◈
글쓴이 : 민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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